이것저것2014.01.12 13:30

집사람이 다니는 교회에서 행사가 있는데, 그때 집사람에게 어떤 직함이 주어지기로 했나 보다. 꽃다발을 들고 와 축하해 달란다.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나는 꽃다발을 들고 그곳에 간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평소 같은 종교를 가져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미안함과 축하해주는 사람이 없어 집사람이 창피하고 외로워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당일 꽃을 사들고 예배 시간 중간에 교회에 본당에 들어서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향하는 듯하다. 사실 그들의 시선은 내가 든 꽃을 향했던 거 같다.


꽃다발을 건네줄 시간은 언제 오는지, 본당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따분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본 예배가 다 끝났는데도 꽃을 건네줄 시간은 찾아오지 않고, ‘다음 회의가 있으니 그때 직함 수여식이 있을 예정이란’ 안내 음성만 들려온다. 관심에도 없는 것에 대한 설명을 30분 넘게 듣고, 이제 교회 자금 운용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는데, 아무 관심도 상관도 없는 나는 꽃다발을 들고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지루함의 시간이 너무 길다. 그나마 중간에 집사람과 아들이 나타나 지루함은 덜해졌다. 교회에서 준 귤을 아들에게 까주는데 무척 잘 먹는다. 앉은 자리에서 2개는 먹었나 보다. (이때부터 집 냉장고엔 귤이 항상 있게 됐다.)


교회 분위기가 어딘가 맥 빠진 상태다. 체계도 없고 몇몇 신도를 빼고는 열의가 보이지 않는다. 직함 수여식 차례가 왔는데 꽃다발을 건네줄 시간도 주지 않는다. 그냥 호명하고, 인사시키고, 들여보내고 그게 다였다. ‘이 공간에 있을 이유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건가?’란 생각이 들며 짜증이 밀려온다. 원치 않는 공간에 1시간 넘게 날 잡아두게 된 집사람은 내게 미안해하며 난처하고 당황스러워한다. “꽃을 건네주는 시간이 있다 했는데...” 하며 말이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집사람은 계속 미안해한다. 난 보통 때와는 다르게 화를 내지 않았다. 축하를 위한 시간에서 화를 내면 안 될 거 같다 생각했나 보다. 그냥 오랜만에 ‘집사람에게 꽃 선물을 한 것’으로 치자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화병을 찾아 그 화병에 대한 경험을 매뉴얼 삼아 물과 꽃을 담았다. 역시 꽃은 꽃이다. 집안 분위기가 한층 꽃 같아진다.



연말연시를 처가에서 보내고 돌아오니 꽃과 화병의 물이 상해있다. 상한 꽃과 가지를 정리하고 화병을 씻고 다시 물과 꽃을 담았다. 그러고선 몇 시간 후인가 화병을 보는데 화병에 물이 맺혀있다. 물이 맺힌 화병은 무더운 여름 시원한 생맥주가 담긴 호프잔 같아 보인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보기 좋아 계속 보고 있는데 ‘물이 맺힌 듯하게 만들어진 컵은 없을까?’란 생각이 든다. 예쁠 거 같은데 말이다. 누가 한번 만들어 보시라.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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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선과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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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화병이 플라스틱이었다면 바로 맥주잔으로 써도 되겠는데요ㅎㅎ
    아 맥주 한 잔 시원하게 하고 싶어집니다.

    2014.01.15 02:5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렇죠? 며칠간 아프느라 맥주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이제 조금 컨디션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컨디션 좋아지면 마시지 못하고 있는 냉장고의 캔맥주를 시원하게 마셔볼 생각입니다.

      2014.01.16 16:49 신고 [ ADDR : EDIT/ DEL ]
  2. 동호

    수고했네.. 교회라는 곳이, 종교라는 것이 적지 않은 경우, 참 답답하게도 하고 짜증이 나게도 하는 것 같아.
    상식에 어긋나는 일도 번번히 일어나고.. 그래도, 네가 마음을 완전히 닫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 천년 동안 그렇게 잔인하고, 유치함의 연속을 반복하면서도 망하지 않고 아직도 교회가 서 있는건, 그저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 외에도, 뭔가가 있어서 아닐까.. C. 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 기회가 되면 읽어볼래. 언제곤, 만날 기회가 생기면, 좀 더 같이 얘기도 나눠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사진처럼 보기 시원한 생맥주를 곁들어도 나쁘지 않을 듯.. ㅎㅎ

    좋은 하루,

    2014.01.15 08:2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며칠 전 글을 봤는데 아파서 답글 쓸 마음이 안 생기더라고요. 몇 년간 감기 한번 걸리지 않더니, 그간 아프지 않던 것을 몰아서 아프게 하는 듯해요. 오늘부턴 좀 괜찮아지네요.
      그나저나 형의 글('뭔가가 있어서 아닐까'로 끝나는 부분) 설득력 있는데?^^ 책 한번 찾아볼게요. 책 괜찮으면 집사람한테 선물도 하고요. 나이도 먹고 운동도 안 해서 그런지 아픈 게 오래가는 듯하네요. 운동해야겠어요.

      2014.01.16 17:14 신고 [ ADDR : EDIT/ DEL ]
  3. 어미새

    신년에 오래 아프셨군요. 저도 좀 아팠어요. 이번 감기는 꽤 독하고 오래가던걸요.
    이제 기운차리신 듯해 다행입니다. ^^

    2014.01.19 21:2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예. 블로그를 통해서 아프셨다는 걸 전해 들었습니다.
      아직은 감기의 찌꺼기 같은 것이 남아 있긴 한데 점점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1.19 23:30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