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 스크랩2014.04.28 02:03

등록 : 2014. 04. 24 19:10            한겨레

  

비통하고 참담하다. 이웃의 고통과 불행에 무감해진 사회라 하지만 이 가혹한 시간을 별일 없이 감당하는 동시대인은 어떤 인간인가. 

가슴이 먹먹해지고 자꾸만 눈물이 나려 한다. 

탑승자 476명, 구조자 174명. 실종자와 사망자 302명.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종자가 사망자로 바뀌었을 뿐. 


본디 실종자라는 말은 올바른 정명(正名)이 아니었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명칭과 실질은 일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람들은 모두 배 안에 갇혀 있었다. 실종자는 “종적을 잃어 간 곳이나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을 뜻한다.

국민 모두 알고 있었다. 생사는 알 수 없지만 종적을 잃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을.

실종자보다 긴급구출 대상자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정부 당국은 연일 함정 수백척, 항공기 수십대, 잠수요원 수백명이 구조 활동에 나섰다고 발표했다.

나만 그랬을까, 그 숫자들이 공허하게 다가왔다.

하물며 생때같은 자식을 칠흑같이 어둡고 차가운 사지에 둔 채 속수무책으로 발만 동동 구른 부모들에게 그 숫자는 무엇이었을까.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는 헌법 34조에 값하는 것이었던가.

그 숫자들은 긴급구출이 요청되는 국민을 실종자로 규정한 뒤 ‘실종자 수색’ 교범에 따른 군사행정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실상 긴급이란 말도 부족했다. 순간순간이 경각과 같았다. 바로 눈앞에, 코앞에, 300에 이르는 국민이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다.

국가라면, 국가다운 국가라면 국가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구조의 손길을 뻗는 일에 총력을 집중해야 했다. 군, 관, 민의 구분이 있을 수 없었다. 모든 역량과 모든 지혜를 모아야 했다.

그런데 <뉴스타파>의 보도에 따르면, 침몰 첫날 실제로 잠수한 요원은 단 16명, 그 이튿날도 38명뿐이었다.

절체절명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유속이 빠르고 시계(視界)가 좁아 잠수 자체가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대천명’(待天命) 이전에 ‘진인사’(盡人事)가 없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늘을 탓하기 전에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지 않았다. 가족들의 분노와 절망은 무엇보다 이 점에 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단 일초가 여삼추인 가족들의 애타는 심정에 마음으로 공감할 줄 아는 정부 당국자를 찾을 수 없었다.

마음이 없거나 부족한데 행동이 따를 리 없었다. 


무릇 못난 자일수록 자신의 무능을 탓하기에 앞서 남 탓을 한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에게 그에 맞는 능력과 책임의식이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절망으로 바뀌어가자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을 지목해 

“살인과 같은 행태”라고 말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비판적 지적도 있었지만, 대통령이 ‘살인’이나 ‘암’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특히 나 같은 사람에게 살인이라는 말은 살인정권을 떠오르게 하고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을 되돌아보게 한다. 


나도 물론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을 옹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들은 비난받아야 하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특히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계속되는 중에 자신들만 아는 통로를 이용하여 탈출한 것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동시대를 사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라면 그 자리에 있었을 때 누구처럼 행동했겠는가?

승객들을 사지에 놔둔 채 도생한 선장이나 선박직 선원들처럼 행동했겠는가, 아니면 승객들에게 구명조끼를 건네주면서 살아 나오도록 도와준 뒤 목숨을 잃은 박지영씨처럼 행동했겠는가. 


이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을 저울질하는 이른바 언론인에게, 바다가 세월호를 완전히 삼킨 날 기념사진을 찍은 분에게, “청와대 안보실은 재난 사령탑이 아니”라면서 책임론에서 벗어나려는 청와대 인사에게 정말로 묻고 싶다.

그대가 그 선장과 선원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

워낙 높은 분들이어서 그런 하찮은 자리에 있을 일은 결코 없다고 답할 것인가.

같은 물음을 나 자신에게 던졌다. 참으로 부끄럽게도 자신 있게 박지영씨처럼 행동했을 것이라고 답하지 못했다.

그러면 젊은이들에게 배를 벗어나도록 도와준 뒤 자신도 일단 살아남았지만 참담한 상황을 목격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단원고 교감선생처럼 행동할 수 있었겠는가? 이 물음에도 솔직히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어서 ‘타이타닉호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이나 선원의 자리에 있었다면?’ 하고 물어보았다.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먼저와 달랐다. 단 한 명의 승객이라도 더 구하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하다가 마침내 두 동강 나 심해 속으로 빠져 들어간 타이타닉호와 함께 장렬하게 수장되는 길을 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20세기 초 타이타닉호의 선장과 선원 같은 선장과 선원을 21세기 한국에선 찾을 수 없기 때문인가. 


세월호 선장은 1년 계약직으로 비정규직이다. 다른 선원들도 다수가 비정규직이다.

그들에게 배는 다만 밥벌이를 해주는 임시적 일자리에 지나지 않았다.

타이타닉호의 선장이 마지막 순간까지 움켜쥐었던 키는 타이타닉호와 자신이 운명공동체임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그것은 직업으로서의 소명의식과 함께 자존감, 그리고 어떤 고결함까지 형성케 했을 것이다.

한국의 선장과 선원들에게는 그런 상징물이 없다. 배와 운명을 같이한다는 일체감도 애착도 기대할 수 없고 선장을 중심으로 하는 일사불란함도 없다.

그들에게 자신이 배와 운명을 같이한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선체 고장이 자주 일어났는데 ‘괜찮겠지’ 하면서 대충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자본의 이윤 추구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것, 이것이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하는 ‘줄푸세’의 핵심논리다.

이명박 정권은 경비 절감을 이유로 20년으로 제한된 여객선 선령을 30년으로 연장해주었다.

돈벌이에, 자본의 이윤 추구에 사람의 안전은 고려사항에 속하지 않는다.

온통 탐욕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차라리 뻔뻔함이 성공의 열쇠가 된 사회다.

중고 배를 수입해 증축해도 안전검사를 쉽게 통과하고, 컨테이너를 결박하지 않은 채 과적하여 운항해도 통제되지 않는다.

이런 게 세월호만의 일이겠는가. 사회 전체적으로 만연되어 자리 잡힌 경향이고 흐름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아래 자본과 국가기관은 탈규제에 있어서 한통속이었다.

모든 규제를 암이라고 규정한 박근혜 정권의 시대에는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탑승자와 구조자의 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만큼 국민의 안전과 생명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가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을 엄단하겠다고 윽박지른다.

유언비어가 신뢰 없는 사회의 반영물이라는 점을 돌아볼 때 정부가 그 진원지임을 모르는 것인가.

책임의식이 추호도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들에겐 이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 “권력의, 권력에 의한, 권력을 위한 정부”인 것이다.

돈과 자본 앞에 사회가 오래전에 무너졌듯이, 대학과 언론이 무너졌듯이, 민주주의는 이미 죽었다. 


지금 이런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넉넉지 못한 살림에 쌈짓돈을 모아 보낸 자식들은 영영 부모 곁으로 되돌아오지 못한다.

희생자들에게,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 동시대를 사는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송구하고 또 송구할 뿐이다.

이 잘못된 사회의 흐름을 막지 못한 무능함도 큰 죄일 터, 망자들에게 명복을 빈다고 말하기에도 면목이 없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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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선과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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