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 수리를 직업으로 하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너 스티커도 만들었었지?”하고 묻습니다.제가 오래전 인쇄물 관련 일을 했던 것을 기억했나봅니다.
나 : 왜? 스티커 만들라고?
친구 : 어
나 : 그래? 요즘은 그런 작업 안하는데... 음... 요즘 한가하니 만들어 줄게. 스티커에 들어갈 내용, 문자로 보내줘. 근데 급한 건 아니지?
친구 : 급한건 아니야. 고마워.
오랜만에 고민 없는 작업을 했습니다. 창작을 위한 고심이 없어 편합니다. 집사람이 이런 스티커는 원색적이고 촌스럽게 작업해야한다면서 재미있어 합니다. 집사람도 디자이너 였던지라 재미있는 관심을 보입니다.
디자인의 어원은 '계획' 내지는 '설계'라고 합니다. 즉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위하여 세우는 일련의 행동 개념을 말합니다. ‘목적’이라고 했는데 제 친구에게 이 스티커 ‘디자인의 목적’은 뭘까요?
보일러 수리는 겨울에 많습니다. 친구의 스티커는 겨울의 수확을 위해 여름에 뿌려지는 씨앗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전기 드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이들이 그림을 걸 수 있도록 벽에 뚫린 구멍을 사는 것이다.” ‘스틱’이란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스티커를 본다면 친구는 보일러가 고장난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만든, 더 정확히 말하면 연결 기회를 만든 것일겁니다.
다세대 주택을 보면 집 외부에 샤시로 된 보관함을 만들어 그곳에 보일러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샤시의 외부엔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이사짐센터, 배관수리, 음식배달, 보일러수리 등등...’
경쟁의 장에 오를 여건이 되지 않는, 그들 소규모 사업자들에겐 그런 곳이 수확을 위한 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씨 뿌릴 곳이 그런 곳 밖에 없는 거죠.
지금쯤 친구는 스티커를 어딘가에 붙이고 다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들이 씨앗이 되어 겨울에 풍요로운 결실이 생기길 바랍니다.
아! 친구가 셋째를 가졌다는군요. 이쁜 딸이랍니다. 내년엔 입이 하나 더 늘테니 더 많은 수확을 원할거 같습니다. 제가 만들어준 스티커가 친구의 수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무척이나 기쁘겠습니다.
내일부턴 길에서 보게되는 스티커들이 지저분하게 느껴지지 않고 ‘누군가의 씨앗이겠구나’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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